조선문단 터

1924년 2월, 동대문구 용두동 168-1(당시 고양군 숭인면 용두리 168-1)에서는 제1회 조선문단 합평회가 열렸다. 합평회는 여러 문인들이 모여 서로의 작품을 비평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이다. 이 합평회에는 이광수, 현진건, 김억, 박종화, 방인근, 최서해, 나도향, 염상섭이 참여했다.

1호선 제기역 1번 출구에서 20분을 걸어 도착하는 조선문단 터에는 현재 솔바람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솔바람공원은 아파트를 지으며 공공 부지로 조성되었다. 하지만 이 곳에는 조선문단이 머물렀음을 알리는 표지석조차도 없다.

<조선문단>은 순수 문예지로 이광수가 1924년 10월 창간하여 1936년 6월 통권 26호로 종간되었다. 조선문단은 자연주의 문학을 성장시켰으며, 민족문학의 순수성을 옹호하고, 당시 한국문단을 휩쓸던 계급주의적 경향문학(傾向文學)을 배격하였다.
이 잡지의 추천제에 의하여 작가가 된 사람은 최학송(최서해) · 채만식 · 한병도 · 박화성 · 유도순 · 이은상 · 임영빈 · 송순일 등이고, 주요활동 문인은 이광수 · 방인근 · 염상섭 · 김익 · 주요한 · 김동인 · 전영택 · 현진건 · 박종화 · 나도향 · 이상화 · 김소월 · 김동환 · 양주동 · 이은상 · 노자영 · 진우촌 · 양백화 · 조운 · 이일 · 김여수 등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탈출기>의 작가 최서해는 이 곳에서 기숙하며 조선문단의 편집을 맡았다. 그의 <탈출기> 등 대부분의 작품 또한 이 곳에서 탄생했다. 최서해의 본명은 최학송이다. 그는 서해(曙海, 새벽바다)라는 필명으로 '자신이 체험한 사실을 토대로 쓴 작품'이라고 밝힌 <탈출기>를 발표했고, 그 작품이 거론되는 '조선문단 합평회'에서 자신이 최서해임을 밝혔다. 또한 조선문단의 첫 대담을 6회까지 기록하고 타자로 쳐서 출판하는 편집 일까지 도맡아 한다.

그와 조선문단의 인연은 깊은데 시조시인 조운의 누이와 조선문단 건물에서 결혼식을 했으며, 돈이 없어 편집자 시절 이곳에서 기거했다는 기록도 있다. 최서해는 1932년 지병인 위협착으로 치료 도중 사망했는데, 그의 이른 죽음을 안타까워한 작가들에 의해 조선 최초의 문인장이 치뤄진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장례를 치른후 두 손자를 데리고 고향땅 함경도 회령(나중엔 성진)으로 가는데 네 해 지나 며느리도 죽고 아이들은 거지 생활을 하며 지내다 큰아들은 폐병을 얻어 외삼촌 조운을 찾아 영광에 왔다가 일주일 만에 죽고 둘째아들 택은 북한으로 돌아가 고아가 된다. 이 일화는 최택에 의해 1985년 북한 잡지 <조국>에 발표되었으며, 이 글은 2010년 3월 <현대문학>에 게재되었다. 최서해의 첫째 딸도 두 번째로 얻은 딸도 그가 살아 있을 때 아사로 죽었다 하니 그의 문학이 어디에 머리를 두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으며, 그의 대부분의 작품이 동대문구에서 쓰여졌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출처: 동대문구답십리도서관 우리 동네 작가를 찾아서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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