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광장

1911년 청량리역의 철도 운행을 시작으로 청량리역 부근이 교통의 중심지로 떠오르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939년, 총독부가 주관하는 대형행사인 조선대박람회의 장소로 청량리역 일대가 선정되었다. 조선대박람회는 조선총독부 시정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였다. 조선대박람회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와 1929년 조선박람회와 달리 총독부가 직접 주최하지 않았다. 그러나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의 주최에 총독부가 적극 지원하는 형태로 진행된 일제강점기 최대의 박람회였다.

박람회 개최 장소는 동대문 밖 청량리역 인근의 35,000평 정도의 부지로 정해졌다. 이 부지는 철도국에서 청량리를 기점으로 한 중앙선 건설계획에 따라 철도 부지로 확보하고 있던 것이었다. 1940년 4월 5일 성대한 지진제를 거행하고 나서, 6월 5일 행사장 중앙도로 부설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했다.

1940년 9월 1일, 1년여가 넘는 준비 기간 끝에 드디어 박람회가 개최됐다. 개회식 후 정오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는데, 박람회 개회를 기다리는 군중의 수가 2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그리고 개막식 당일에는 무료입장을 단행해서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청량리, 특히 청량리역 일대는 조선대박람회를 통해서 준비기간을 합한 1년여의 기간 동안 박람회의 개최장소로서 세간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그러나 박람회 폐막 이후 박람회장이 철수되면서 점차 일반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됐다.

청량리역 광장은 청량리를 주변으로 한 동부 서울의 공공장소로 기능했다. 청량리역 광장은 유동인구가 많은 역세권에다가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있는 넓은 부지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각종 행사의 개최장소로 이용됐다. 특히 청량리역 광장은 선거 때마다 벌어지는 유세의 주요 개최지로 이용됐다. 1987년 대선이 직선제로 바뀌면서 청중 동원을 통한 대규모 유세를 통해서 세를 과시하는 방식으로 선거가 진행되면서, 선거에서 유세가 갖는 의미가 커졌다. 그리고 대선과 총선을 비롯하여 1991년 지방선거로서 지방의회를 구성하고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을 민선하게 되면서 치러야할 선거도 많아졌다. 대선 · 총선 · 지방선거를 가릴 것 없이 동부 서울의 유권자를 만나는 유세장으로 청량리역 광장은 선거철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게 된다.

청량리 일대에는 경희대.서울시립대.한국외대 등 대학이 자리하고 있었따. 이들 대학이 연합시위를 벌일 때 사용한 장소가 바로 청량리역 광장이었다. 1991년 4월 당시 명지대학교 학생이던 강경대가 경찰사복 체포조, 이른바 백골단의 폭행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생이 거세게 일어났다. 1991년 5월 4일 서울시립대학교 학생과 서울 동부지역 학생 1천여 명이 정부의 ‘공안통치’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게 되는데 이 때 시위의 출발지로 선정된 것이 청량리역 광장이었다. 이들은 청량리에서 출발해서 시청까지 행진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웠는데, 앞서 언급한대로 청량리 인근에 대학이 밀집해 있는 상황에서 대학생들이 시위라는 형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고자 할 때 청량리역 광장은 이들의 목소리가 울려펴지는 시위의 공간으로 변화했다(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청량리광장에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여행을 시작하기 전의 설렘과 추억이 깃들어 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자신들의 이야기를 크게 외치며 시위나 유세를 펼치는 역동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청량리역 광장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남아있는 공공의 역사를 담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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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역 광장의 옛날 모습
일단 사람들이 시골에서 올라오면 싸고, 양 많고, 빨리 먹을 수 있는 걸 찾았다. 그래서 우동집, 김밥집 등이 있었고 떡, 계란 삶은 거, 냉차 등을 팔았다. 암표장사도 많았다. ~ Source: 한정완 (한잔생각 국수생각) 한정완은 대왕코너 자리 옆 건물에서 30년 넘게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 Creator: 안대진 ~ Date: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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