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제원

조선시대에 이르러 도로가 발달되면서 원(院)과 역(驛)이 생겼다. 역은 서울인 한양 도성에서 전국의 각 지방에 이르는 30리 길마다 도로가에 설치하여 중앙과 지방간의 문서전달 관문, 공세(貢稅)의 수송, 또는 관료들의 공무여행 때 마필의 잠자리나 먹이 등을 제공하던 곳이었다. 원은 주로 공용여행자의 숙소 및 식사를 제공하기 위하여 역 가까이 설치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서울 근처의 원은 동대문 밖의 보제원, 서대문 밖의 홍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그리고 광희문 밖의 전관원이 있었다. 세종대왕 때의 역사 기록인 세종실록에 의하면 “흥인문 밖에 보제원, 소의 문 밖에 홍제원을 설치하고 배고픈 이들의 진제장(賑濟場)으로 사용하고자 토자(土字) 형태로 2칸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제장은 배고픈 이들의 허기를 진정시키는 곳, 즉 밥을 먹여 주는 곳이란 뜻이다.

조선시대 흥인문(동대문) 밖 3리 지점, 한성에서 동북 방향으로 드나드는 길목에 보제원이 있었다. 보제원이란 명칭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보호하는 구휼기관이었다. 보제원은 공용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역할 외에도, 태종때부터 성종때까지 한의원과 의좌, 간사회 등을 배치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진료를 해주기도 하였다. 보제원은 주로 도성내 병자의 구료를 주업무로 했지만, 때로는 무의탁자를 수용하고 행려병자를 구료하는 역할도 하였으며, 사망시 매장까지 해주는 등 구휼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출처: 동대문구 문화관광).

조선시대의 기록에서는 보제원이 마중과 배웅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구휼기관과 연회의 장소까지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세종 69권의 “굶주린 백성을 보제원과 홍제원에 나누어 진휼하도록 하라”라는 기록을 통해 보제원이 굶주린 백성에게 도움을 줬음을 알 수 있다. 세종 53권에서는 “윤봉과 장정안이 두목 42명을 거느리고 함길도를 향해 떠나니, 좌대언 김종서에게 명하여 의정부·육조와 같이 보제원에서 전송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보제원에서 한양을 떠나는 사람을 배웅했음을 찾아볼 수 있다(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옛날부터 보제원 주위에는 경기도, 강원도 쪽에서 한약재를 채취해 파는 약재상인들이 많았다. 오늘날 서울약령시로 지정된 경동한약상가가 보제원 인근 용두동과 제기동 일대에 번창하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질병과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식량과 의료를 베풀어 희망을 전달하던 보제원의 생명존중 정신이 지금까지 약령시를 통해 전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출처: 동대문구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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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원의 역사
조선시대 네 개의 구휼기관이 생겨요. 동북쪽에는 보제원이 있었는데 오랜 여행에 지쳐서 병들고 지치고 배고픈 사람들이 잠도 자고 먹고, 치료도 하던 곳이예요. 약령시 상인들은 보제원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요 ~ Source: 강경태 ~ Creator: 안대진 ~ Date: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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