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로

1895년 가을, 일본 세력의 경복궁 습격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된다. 경상도 선산에서 학문에 전념하던 왕산 허위는 이 사건에 분노하여 전국 곳곳에 창의문(倡義文)을 써 붙여 의병을 모으기 시작하여 을미의병의 한 주축을 이루었다. 금산(현재의 김해)에서 이기찬과 함께 삼백여명의 의병을 모은 허위는 금산의 관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금산을 점령하고 한양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삼백명의 급조된 의병으로 천 이백명의 관군을 맞아 싸우는 것은 무리였고, 진격하는 과정에서 첫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했다.

1907년, 잠시 벼슬에 올랐으나 일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구금되고 결국 관직을 사임한 허위는 경기도 연천, 적성 등지에서 다시 한 번 의병을 일으켰고 약 천명 정도가 모였다. 허위는 강원도 원주 지방의 의병장 이인영(李麟榮)과 13도 의병을 통합하였는데 이 숫자가 만 명에 다다랐다. 전국 13도 연합의병 창의군은 서울진공작전을 위해 서울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허나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의병들이 변변치 않은 무기를 들고 신무기를 사용하는 관군을 상대하기는 역시나 쉽지 않았다. 왕산 허위가 이끄는 13도 의병은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패배하고 말고 임진강 유역에서 다시 집결했다. 원래 이인영의 부대 규모가 더 컸으므로 총대장을 맡고, 허위는 군사장의 직책을 맡았으나 이인영의 부친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인영이 귀향하게 되어 허위가 총대장을 맡아 활동하게 되었다. 이 때 총리대신 이완용이 사람을 보내 관찰사나 내부대신의 자리를 주겠다며 유혹했으나 허위는 이를 단번에 거절하고 돌려보냈다. 결국 1908년 왕산 허위는 일제에 체포되었으며,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후 9월 27일 교수형에 처해 순국했다(출처: 동대문구청, 왕산허위선생기념관 홈페이지).

허위 (許蔿)는 경상도 출신의 구한말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왕산 (旺山)은 허위의 호이다. 1854년 4월 1일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영특하다고 근동에 소문이 날 정도로 똑똑하여 다섯 살에 천자문을 읽고 해석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마다하고 고향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수련한 학문으로 서당을 차려 오로지 후학을 가르치는 데만 전념하였다(출처: 동대문구청).

왕산 허위의 가문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전통 성리학을 공부하였는데, 작은 아버지 해초공(海樵公)과 맏형인 방산공(舫山公) 허훈에게 글을 배웠다. 방산공은 당대에 문명을 크게 떨쳤던 분이다. 열아홉 살 연하의 동생에게 글을 가르치며 방산공은 “유교의 학문에 있어서는 내가 아우에게 양보할 것이 없지만 포부와 경륜에 있어서는 내가 아우에게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여 왕산 허위선생이 범상치 않음을 꿰뚫어 보았다(출처: 왕산허위기념관 홈페이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안중근 의사가 거사 후 법정에서 왕산 허위선생을 평하기를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선생과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선생은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라고 한 것을 보더라도 허위선생의 인품이 어떠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출처: 왕산허위선생기념관 홈페이지).

- 왕산 허위 선생이 순국하기 전에 남긴 말씀 -
父 葬 未 成 아버지의 장사를 아직 마치지 못했고
國 權 未 復 국권을 회복하지 못했으니
不 忠 不 孝 충성도 못했고 효도도 하지 못했으니
死 何 瞑 目 죽은들 어찌 눈을 감겠는가

초야에 묻혀 부모에게 효도하며 후학이나 가르치면서 살아야 했던 한 선비가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분연히 일어나 손에 잡았던 책 대신에 창칼을 잡아야 했던 허위의 일생이야말로 안보의식이 절박히 요구되는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하겠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허위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고 왕산 허위가 의병을 이끌고 그토록 밟고 싶어했던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 3.3㎞ 도로 이름을 '왕산로'라 명명했다 (출처: 동대문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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