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이문동 성당

동대문구 이문동 321-31번지에 위치한 이문동 성당은 2012년 50주년을 맞이했다.

1955년 제기동 본당 성당으로부터 분가한 청량리 본당은 청량리를 비롯해 전농동, 휘경동, 이문동, 회기동, 답십리, 제기동 일부와 경기도 일원 공소신자들로 구성되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청량리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주민 수가 급속히 증가하였는데 대개는 시골에서 상경한 가난한 사람들로서 일정한 직업도 없이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빈곤한 생활을 하였고, 사대문 안에서 밀려나 이사 온 가난한 사람들도 상당 수 있었다.

지역주민의 증가로 청량리 본당의 신자 수도 많이 늘어 났다. 그 중에는 성당에서 배급해 주는 구호품인 밀가루, 우유(탈지분유) 등을 얻기 위해 나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들 중에는 독실한 신심과 열성적인 활동으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또한 급격한 도시개발붐의 여파로 채소밭이었던 이문동 일대에 주택가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속히 증가되고 이에따라 신자들의 수도 늘어나게 되었다.

청량리본당과 거리적으로 불편을 겪던 답십리, 이문동 신자들 사이에서 분가의 의견이 자주 거론되었다. 당시 분가 대상 지역으로는 답십리와 이문동이 거론되었고, 현실적으로는 답십리 지역에 살고 있는 교우 수가 휘경동, 이문동 지역보다 배나 많았고, 교무금 납부실적도 답십리 지역이 월등히 높았기 때문에 당시 주임 신부이던 이삼복 신부는 내심 답십리 지역의 우선 분가가 효과적이라 여겼다.

하지만 교우들의 증가추세와 장래 발전성등을 고려하여 이문동지역의 분가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삼복 신부는 자신들의 성당을 갖고자 하는 이문동지역 신자들의 간절한 소망과 앞으로의 발전 추세등을 감안하여 고심하던 끝에 1961년 여름 이문동 지역의 분가를 승낙하였다.

당시 성당부지 확보를 위해 여러 교우들이 동분서주 하였는데 김규영 토마스 신자는 경희대학교 총장을 만나 넓은 캠퍼스의 한 모퉁이를 희사해 달라고 졸라보기도 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느 날 430여평의 빈 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최이주 형제가 가 보았는데 산등성이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으로 성황당 터였다. 성황당 큰 나무 위에는 붉고 푸른 천등이 걸려있어 울굿불굿 했으며 밑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성황당 빈 터를 놓고 여러 교우들이 의논을 하였는데 하느님의 성전을 짓는데 성황당 터면 어떠하냐는 의견이 대부분이며 무난하다는 평이었다. 더욱이 이 터는 주변동네 사람들에게 터가 세서 흉가의 자리라고 소문이 나서 살 사람도 없느 땅이라 시세에 비해 매우 싼 값이었다.

최이주 프란치스코 형제는 성황당 터 매입을 이삼복 신부에게 보고하고 땅 지주와 협상을 추진하여 당시 화폐교환권 시세로 4,300환(평당 430원)을 주고 이문동 321-31번지 430평을 이삼복 신부 명의로 매입하였다.

성황당 터를 샀다는 말이 퍼지자 마을 사람들은 시세의 반 값도 안되는 가격으로 샀다면서 기뻐해주었고, 부지 매입에 앞장섰던 최이주 신자에게 많은 교우들이 고마워했으며 특히 이삼복 신부의 도움에 깊이 감사했다(출처: 이문동 본당 5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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