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제기동 성당

천주교는 한문으로 번역되고 저술된 천주교 서적을 통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이를 학문으로 연구하던 남인 학자들 사이에 천주교 신앙이 싹텄다. 그러나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한 크고 작은 박해로 혹독한 시련의 시기를 지내야 했다. 하지만 신앙의 선조들은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복음을 전파하는 한편, 늘어가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돌볼 성직자를 맞아들이고자 쉼 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대목구를 설정했고, 조선에서의 전교와 사목을 파리 외방 전교회에 맡기게 되었다(출처: 천주교서울대교구 홈페이지).

천주교 제기동성당은 서울대교구에서 일곱번째로 설립된 본당이다. 조선교구설정 100주년을 맞이했던 1931년, 서울에는 명동(1881년), 중림동약현(1891년), 수색(1909년), 혜화동(1927년)성당이 있었고, 그 후 도림동(1936년), 용산(1941년)에 이어 1942년에 제기동성당이 설립되었다. 민족복음화 계획의 일환으로 서울 동쪽에 새 본당터 제기동 260번지를 마련한 것이 오늘날 제기동 본당의 효시이며, 당시에는 젯터공소라 하였고, 혜화동 성당 관리 하에 있었다. 현재의 제기동성당 자리는 원래 잡신을 위하던 제사터였기 때문에제사터를 천주학당들에게 팔면 큰 재앙을 당할지 모른다는 주민들의 생각과 방해가 무척 심하였고, 땅 매입 자금을 강도들에게 강탈당하는 등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41년, 일제는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우리 민족과 교회를 가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또한 사제양성기관인 용산신학교를 폐쇄시켰다. 그리고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귀국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쟝 꼴랭(J. A Colin 한국명 고일랑 요한) 신부는 프랑스로의 귀국을 거부하고, 1942년 5월 9일자로 제기동성당의 첫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신설 본당의 상황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쟝 꼴랭 신부는 직접 식사를 지어 드셨으며, 보리밥에 고추장 아니면 돼지감자로 끼니를 잇는 등 심한 고생을 하였다. 그 후 제기동 본당은 이 지역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전념하며, 고통과 암흑에 신음하던 동족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당시 제기동 본당이 담당하던 구역은 서울 동쪽으로, 퇴계원과 덕소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제기동 본당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많은 본당을 분가시켰으며, 1954년에는 자신의 많아진 신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새 터(제기동 182번지)를 마련하였다. 제4대 주임신부인 김제근 토마 신부의 재임중에는 돈암동 성당처럼 돌로 성전을 축조하자는 신자들의 의견에 1959년 아름다운 석조성당을 건축,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1992년 5월 10일, 선조들의 거룩한 업적을 높이 기리기 위하여 본당 설정 50주년에는 본당의 숙원 사업인 교육관을 건립하게 되었고, 그후에도 사제와 신자들의 꾸준한 조경활동과 관심으로 동대문구의 명소로 불리울 만큼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게 되었다. 제기동 성당은 아름다운 석조건물과 뛰어난 조경으로 혼배성사 장소로 인기를 더해가고 있으며, 사제와 신자들의 깊은 신앙생활과 지속적인 봉사활동으로 지역사회의 중심이 되고 있다(출처: 천주교 제기동 성당 홈페이지)

제기동 성당은 정면 중앙에 종탑을 세운 장방형의 종교건축물로 1950년대 종교건축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종탑과 양측면의 출입구, 돌출부의 지붕 등 준공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하고 있어 종교사 및 건축사적 측면에서 보존 가치가 높은 종교시설이다(출처: 서울미래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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